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카나리스 (문단 편집) === 최후 === 비록 제독과 아프베어는 하이드리히의 죽음으로 잠시 수명을 연장받았으나 후임자로서 하이드리히보다 의욕적으로 아프베어를 병합하려고 했던 신임 국장 [[하인리히 뮐러]] 아래 움직인 SD의 보고 등을 통해 히틀러는 점점 제독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. 결국 1944년 2월, 마침내 카나리스는 아프베어 요원 두 명이 연합군에 귀순한 사건을 빌미로 국장에서 해임되어 강제 예편되었으며, 그 이후 아프베어는 SD와 합병되었다. 그리고 몇 주 뒤, 히틀러는 카나리스를 가택 연금시켰으며, 이것은 그가 1944년 7월 20일의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에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. 그러나 7월 20일의 암살 미수 사건 이후 SS에게 체포된 인원들이 고문을 못 이겨 한 자백에서 카나리스 제독이 언급되기 시작했다. 이미 카나리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 직후, 모종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. 성공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고위당원들을 체포하여 전쟁범죄자로 기소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, 연합군과 협상하면서 종전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. 힘러는 히틀러의 몰락 후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보존할 일종의 안전장치로써, 영국과의 접촉에 유용하게 쓰일 가능성이 큰 카나리스를 당분간 손대지 않았고, 히틀러 역시 그를 가만히 놔두면서 제독과 접촉을 시도하려는 반체제 인사들을 최대한 낚을 요량으로 카나리스의 처분을 유보했다. 그러나 곧 힘러는 자신의 계획이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카나리스를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넘겼고 재판정은 주저 없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. 수감되어 있던 카나리스[* 수감기간 동안 다른 인사들에 비하면 비교적 정중한 대우를 받았는데, 비록 반체제 인사들 중 고위급에 속하는 중죄인이었으나 국방군 내에선 육해공군을 불문하고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기에 SS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고문 등을 당하지는 않았다.]는 독일의 항복을 한 달여 앞둔 1945년 4월 9일,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, 한스 오슈터 장군 등 다른 연루자들과 함께 플로센부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는데, 연합군이 수용소 근처까지 진격함에 따라 서둘러 집행한 것이었다. 전후 [[뉘른베르크 재판]]에서 카나리스의 부하들이었던 육군 장성들인 에르빈 라호우젠과 한스 기제비우스가 카나리스 제독의 이러한 반히틀러 행위를 증언함으로써 그의 공로가 세상에 알려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